
세계는 이미 끝나 있었다
불안은 소리 없이 다가온다.
크러스너호르커이 오슬로의 『저항의 멜랑콜리』는 한 여인의 불안으로 시작된다.
플라우프 부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있었다.
도시의 공기는 탁했고, 사람들의 표정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집은 잠시의 피난처였지만, 그 안으로도 결국 세상의 어둠이 스며들었다.
“도둑질하고 사기질, 사악하게 비뚤어진 세상이라니까,
신은 더 이상 그런 일에 참견하고 자시고 하지를 못해.” (p.32)
그 한 문장 안에 이 세계의 본질이 들어 있다.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방향을 잃었다.
세계는 끝났고, 인간은 그 끝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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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권력을 낳는다
불안이 커지면 누군가는 그것을 이용한다.
에스테르 부인은 그 불안을 정치적 언어로 바꿨다.
“질서의 회복”, “정직한 사회”, “새로운 시작” 같은 말들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말들은 구원의 언어가 아니라, 공포를 정당화하는 언어였다.
“당연해요. 불안해하지 않을 까닭이 없죠.
우리는 좀 더 엄중한, 좀 더 정직한,
좀 더 개방된 사회의 문턱에 와 있어요.” (p.76)
그녀가 불러들인 서커스단은 혼돈의 상징이었다.
그들이 데리고 온 거대한 고래는
마을 사람들이 억눌러왔던 불안을 실체로 만들어버렸다.
사람들은 그 거대한 형체를 바라보며
자신 안의 불안을 외부의 존재로 오해했다.
그리고 그 불안은 곧 폭력이 되었다.



조율할 수 없는 세계
에스테르는 세상의 질서를 조율하려던 인물이다.
그는 ‘베르크마이스터 조율’이라는 완벽한 음률의 이상을 믿었지만,
세상은 이미 조율 불가능한 상태였다.
“지식은 대대적인 착각 혹은 짜증나는 우울로 이끈다는 자각,
이런 단순한 자각 과정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p.318)
그는 세상이 틀어졌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명확히 인식했지만,
그 인식이 그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창문에 빗장을 걸고 세상과 단절했다.
이성의 침묵, 그것이 오슬로가 말한 지성의 운명이었다.
순수의 무력함
벌루시커는 세상의 마지막 순수였다.
그는 모든 것이 우주의 질서 안에서 돌아간다고 믿었다.
그에게 세상은 선악의 구분이 아니라 조화의 문제였다.
그러나 순수는 세상의 폭력 앞에서 언제나 무력하다.
“그는 그들이 움직이면 그들과 함께 움직였고,
그들이 멈추면 그도 멈췄지만,
그는 이를 의식하지 못했다.” (p.366)
그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한 채
세상의 파괴에 흡수된다.
그의 순수함은 더 이상 구원이 아니라,
세상에 동화되는 또 하나의 패배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불안으로
군대가 들어와 폭동을 진압하고,
세상은 겉보기엔 다시 질서를 되찾는다.
그러나 오슬로는 묻는다.
그것이 정말 회복일까?
“전반적인 적막감에 싸인 이웃 지역은
치명적인 악역의 여파를 내비치긴 해도,
삶의 부수적인 일들은 본질적으로 변함없이
해를 입지 않고 남아 있었다.” (p.212)
세상은 파괴되었지만, 본질은 그대로였다.
혼돈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다시 불안이 채웠다.
오슬로의 세계에서 종말은 끝이 아니라, 순환의 시작이다.
멜랑콜리의 세계
『저항의 멜랑콜리』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저항했다.
벌루시커는 순수로, 에스테르는 이성으로,
에스테르 부인은 권력으로, 대공은 언어로.
하지만 그들의 모든 시도는 결국 멜랑콜리로 귀결된다.
“더 이상 잘난 척은 않고,
마침내 조용히, 입 벙긋하는 법 없이 조용해져야지.” (p.314)
그 조용함이 바로 멜랑콜리의 형태다.
저항은 실패하고, 인간은 다시 침묵 속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도 인간은 살아남는다.
그것이 오슬로가 말하는 저항의 방식,
그리고 인간의 비극적인 아름다움이다.

세계는 계속된다
“폐허로 만들고 다시 재건한다고 한들,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
모든 것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세상은 다시 세워진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이전 세계의 반복된 형태일 뿐이다.
불안은 다시 돌아오고,
멜랑콜리는 우리 곁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다.
“파괴된 세계 속에서도 인간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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